들어가며
이 글은 첫 커리어를 마친 후 저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작성하는 회고록입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작성하는 글이므로 독백체를 사용하였고, 시간 순서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어쩌다 개발자?
1. 대학
나는 전문대학에서 기계설계를 전공했다.
오랜 시간동안 꿈꾸던 전공도 아니었고, 심지어 고등학생 땐 이과도 아닌 문과였다.
그렇다보니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2016년도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군복무 겸 휴학을 해버렸다.
2. 군복무
2019년 2월 군복무를 마치고 총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열심히 놀았다. 하지만 놀면서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걸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 시절 나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무언가를 만드는걸 좋아했다.
그렇게 복학을 뒤로 미루고 쥬얼리 디자인(왁스카빙)을 배우기 위해 9개월동안 공방을 다녔다.
3. 사업(?)
간단히 설명하자면 왁스카빙은 양초의 재료인 왁스를 깎아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고 주물, 가다, 피니싱 과정을 거쳐서 동일한 모양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원 하나도 제대로 못 그릴 정도로 그림에 일가견이 없었지만, 공예는 재능이 있나 싶을 정도로 꽤 괜찮은 악세사리들을 만들어냈었다.
그래서 사업자 등록 후 통신판매업 신고까지 해서 직접 판매했었고, 파트타임 알바 월급정도는 벌었던거 같다.
하지만 이걸로 평생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항상 따라다녔고, 복학을 결심하게 됐다.
4. 졸업과 취업
복학 후 여전히 학업에 흥미를 느끼진 못했지만, 매순간 놓인 상황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복학한 학기에 학과 수석을 경험해봤고, 교내 캡스톤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까지 하며, 꽤 높은 학점으로 2021년 2월 졸업을 했다.
이후 전공에 맞춰 취업준비를 시작했지만, 학교 생활을 제외하곤 아무런 스펙이 없던 나는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약 1년간의 취업준비기간 동안 컴활 1급, 산업기사 3개, 토익스피킹이라는 정량적인 스펙을 쌓았다.
그리고 여러 취업준비 오픈채팅방을 기웃거리며 정보를 모으기도 했다.
그 결과 중견 화학회사의 연구소 오퍼레이터로 취업에 성공하게 됐다.
5. 부정적이었던 첫 사회 경험
작업복을 입은 사진
2022년 1월 첫 회사였고, 첫 사회생활이었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환경과 사람들로 인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뭉개지기까진 1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단순 반복의 업무는 내 성취감을 채우기엔 부족했고, 10년 이상 근속한 팀원들의 언행은 내 미래 모습이 될까봐 경계했다.
그렇게 3개월만에 퇴사를 했고, 또 다시 내가 하고 싶은걸 고민했다.
중학생 때 VisualBasic으로 MP3 플레이어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던게 생각났다.
단순히 내가 필요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혼자 이것저것 찾아가며 만들었던 경험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한창 개발자 붐이 일어나던 시기여서 딱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때 내 인생을 바꿀만한 인복이 작용했다.
취업준비를 하며 기웃거리던 오픈채팅방 중 활동을 많이했던 곳의 대표님께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다.
개발자로 직무전환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로 출퇴근하며 준비해보는건 어떠냐고 제안해주셨다.
그렇게 나의 개발자 커리어 프롤로그가 시작되었다..
나의 첫번째 개발자 커리어
1. 개발자가 되기까지
퇴사를 한 후 대표님과의 미팅을 위해 역삼의 오렌지플래닛으로 향했다.
가벼운 커피챗 느낌의 미팅이었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제안 해주신 내용은 간단했는데, 출근 시간에 맞춰 오전 10시에 출근하고 자유롭게 학습하다가 퇴근하는게 전부였다.
추가로 내가 원한다면 스크럼과 회의에 참여하면서 스타트업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하셨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바로 출근 날짜를 확정지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열정은 가득했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비전공자로 개발자가 된 사람들의 글을 마구잡이로 찾아보고 공통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학습하며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처음 C언어를 공부하며 풀었던 BOJ 문제들
가장 먼저 프로그래밍 감각을 익히기 위해 C언어를 공부하며 이걸로 쉬운 코딩테스트 문제를 풀었다.
마침 co-founder분이 포스텍 컴공이어서 해당 과의 assignments를 풀어볼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동시에 HTML와 CSS 를 공부하며, 단순한 소개 페이지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아직 프론트엔드와 백엔드 중 하나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내 개발자분과 옥상에서 바람을 쐬던 중 나에게 ‘OO님은 프론트엔드랑 백엔드 중에 뭐가 하고 싶으세요?’ 라고 물어보셨다.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았다.
나는 큰 숲(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안에 나무(코드)들을 심고, 그 사이사이 물(데이터)이 잘 흐르게끔 하는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Java와 SQL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들었던 강의
읽었던 책
공부를 할 땐 책, 강의, 유튜브 영상, 기술 아티클 모든걸 다 찾아봤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선 e-book으로 책을 읽고, 회사에선 강의를 보고, 잠들기 전엔 기술 관련 영상을 봤다.
A를 공부하다가도 거기서 파생된 B, C 키워드 등을 학습하면서 지식의 가지를 뻗어나갔지만, 산발적인 학습은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건지 혼란스럽게 했다.
참고했던 로드맵의 일부
앞으로의 학습 방향을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부트캠프를 통해 성장을 부스팅하고자 했다.
하지만 42SEOUL, 멋쟁이사자처럼, 코드스테이츠 중 합격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탈락은 나를 좌절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부트캠프 없이 독학으로 당당하게 성공해보이겠다는 독기를 품게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야생형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던거 같다.
학습을 이어온지 3개월쯤 됐을 무렵 Spring을 공부하기 위해 Node.js로 되어있던 회사의 프로덕트를 Spring으로 새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기존 프로덕트는 MVP여서 그리 크지 않았기에 Spring으로 새로 작성하는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땐 몰랐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이어가게 될 줄은..
2. ‘진짜’ 개발자
독학을 이어온지 5개월이 될 무렵 스스로 평가하기에 6개월의 부트캠프 커리큘럼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전부 학습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회사의 프로덕트를 Spring을 학습하며 그대로 구현한 코드베이스였다.
때마침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인턴 제안을 받게 되면서 실무를 직접 경험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인턴 시작과 동시에 기존 서버를 내가 만든 서버로 마이그레이션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고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 이후부터 나의 성장 속도는 날개가 달린 듯 빨라지기 시작했다.
실무를 접하며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는 경험을 해보게 되고, 실제 사용자들의 트래픽을 받아보는 경험도 해볼 수 있었다.
또한 마주하는 모든 태스크는 나에겐 챌린지로써 다가왔지만, 성장 동력을 가속화할 수 있는 뗄감으로 사용해서 더 달려갔다.
그렇게 정신 차리고 보니 인턴이 끝나갔고 자연스럽게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정규직이 되면서 무언가 달라진거 같았지만, 오히려 성장이 침체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단순히 DB 스키마를 설계하고, 데이터를 저장 및 조회하는 API만을 반복적으로 만들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이때 성장은 계단식임을 깨달았고 새로운걸 학습해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했던게 CI/CD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기존엔 Bastion 서버를 통해 EC2 인스턴스에 SSH 터널링으로 접근하고 터미널 커맨드를 통해 손배포를 했었다.
도커? 배포 전략? 롤백 전략? 다운타임? 그런건 그땐 몰랐다.
배포 도중 다운타임을 줄이기 위해 다른 포트로 서버를 실행하고 Nginx를 통해 트래픽을 라우팅하며 수동 블루/그린 배포 방식을 구축했다.
매번 배포할 때마다 커맨드를 치고 인스턴스로 접근하는게 불편해서 자동화하기 위해 Github Action으로 workflow를 작성하고 CodeDeploy + AutoScaleGroup을 사용하여 자동 블루/그린 배포 방식을 구축했다.
좀 더 나아가 동일한 환경을 구성하고, 리소스를 유연하게 조정하고, 관리포인트를 줄이기 위해 ECS로 변경했다.
이외에도 실제로 겪은 불편함을 토대로 차근차근 개선해나갔다.
이렇게 성장을 끊임없이 갈망했지만 사수와 백엔드 팀원이 없었던 환경은 양날의 검이었다.
주도적으로 해보고 싶은걸 시도해볼 수 있고, 문제 정의와 해결을 스스로 해나가는 과정에서의 배움은 값졌다.
하지만 항상 이게 옳은 방향인지, 내가 잘 하고 있는건지, 성장하고 있는게 맞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인사이트 부족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사용하고 있던 공유 오피스 운영사에서 지원하는 개발자 커뮤니티에 참여하게 되었다.
입주사들의 경영진, 시니어, 주니어 그리고 프론트엔드, 백엔드 등 직급과 직무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른 시야를 보게 되면서 새로운 키워드들을 알게 되었다.
오렌지플래닛 전주센터 스타트업 간담회 발표 사진
사내 컨퍼런스 발표 사진
개발자는 공유하는 것을 즐긴다고 했었던가? 나 또한 그런 성향이었던거 같다.
개발자 커뮤니티를 참여하던 중 운영사의 전주센터에서 지역 취업 준비생, 입주사 개발자, 대표님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간담회의 스피커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처음엔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꼈지만, 지역 취업 준비생들도 참여한다는 말에 용기를 주기 위해 솔직한 이야기를 준비해갔다.
간담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취업 준비생분들의 칭찬과 질문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피드백인 것처럼 느껴졌고, 오히려 내가 얻어갈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이외에도 사내 컨퍼런스에서도 발표 기회를 얻게 되어 서비스 중인 프로덕트의 인프라를 쉽고 간단하게 설명했었다.
목적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프로덕트가 어떻게 만들어져있는지 간단하게라도 이해하며 원팀으로써 얼라인을 맞추기 위함이었고, 비개발직군들을 배려하여 쉽고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했다.
이때쯤부터 공유하는 뿌듯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혼자서 조금씩 작성하던 기술 블로그 글을 팀원들에게 공유했다.
내 글을 읽은 팀원들의 피드백을 받거나, 나를 따라서 블로그를 시작하는걸 보며 팀 문화에도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3. 이직 기회
실무를 경험한지 9개월치곤 나는 꽤 빠르게 많은걸 해왔다.
이건 나 스스로의 평가가 아니고 이직하려 했던 회사 면접관의 평가였다.
그동안 빠른 성장속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삶을 배제한 생활을 보냈었고, 그에 비해 성장에 대한 투자금으로 합리화하던 연봉이 작아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동안 챌린지로 느꼈던 업무들이 평범하게 느껴지며, 회사의 성장 속도가 나의 성장 속도를 못따라오는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이렇게 내 마음 한켠에 꿈틀거리던 욕구를 드러내게 해준건 인생 선배로서 그리고 커리어 선배로서 나를 많이 리드해주셨던 한 팀원분이었다.
항상 성장에 갈증을 느끼던 나를 좋게 봐주시고, 지인 추천을 통해 다른 회사의 면접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기회가 몇번씩 오는데 그 기회를 잡기 위해 평소에 준비해야한다는 말을 깊게 공감한다.
이번 기회가 내 개발자 커리어의 터닝포인트라는걸 직감했고 그동안 해왔던 노력을 정리해갔다.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면접관들이 지었던 미소가 패기만 넘치는 귀여운 주니어를 바라보는 미소였을거 같다.
성장의 계단에서 현재 칸의 끝부분에선 많은걸 해온거처럼 느껴지지만, 다음 칸으로 올라가면 그 전에 했던게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면접관은 9개월 경력치곤 많은걸 했다며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었고 최종 합격까지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엔 무슨 패기였는지 연봉협상 단계에서 40% 인상을 제안했지만 최종적으로 26% 인상으로 오퍼레터를 받았다.
오퍼레터를 들고 대표님에게 1on1을 하자고 슬랙을 보냈다.
사실 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이 확고하진 않았고, 여전히 회사의 프로덕트를 사랑했고 팀원들이 좋았기 때문에 잡아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다행히도 오퍼를 받았던 연봉보다 높은 36% 인상으로 카운터 오퍼를 주셨고, 그렇게 다시 남게 되었다.
물론 연봉이 오른 것도 기뻤지만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 받은 느낌이 더 컸다.
그렇게 나는 커리어에서 한 번의 퀀텀점프를 만들어냈다.
4. 조직의 확장과 갈등, 그럼에도 성장
그 무렵 회사의 기조가 바뀌어가기 시작했고, 조직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회사의 존립을 위해 매출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기획을 담당할 PM/PO 직무의 채용이 진행됐다.
그리고 한참 뒤엔 드디어 나와 함께할 백엔드 팀원도 한 분 생기게 됐다.
이후부턴 BM을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됐으며, 동시에 B2C, B2B로 사용자를 늘리기 위한 마케팅도 진행됐다.
이때부터의 업무들은 여태껏 했던 업무에 비해 꽤나 프로젝트 다운 업무였을뿐더러 볼륨이 컸다.
크게 B2B 사이드에서 상품을 보고 구매 및 결제하기 위한 기능, BackOffice에서 상품을 집행 및 관리하기 위한 기능, B2C 사이드에서 광고 상품을 적절히 섞어서 보여주기 위한 기능 등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대부분의 설계와 개발을 직접 해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해볼 수 있었다.
결제를 위한 PG사론 토스페이먼츠를 사용하여 연동했고, 상품이 상태를 통해 전체적인 생명주기가 관리되도록 설계했고, 생명주기마다 알림 발송을 위한 Batch Job을 작성했다.
그리고 인재풀 상품과 더불어 인사담당자가 열람한 인재들을 대상으로 포지션 제안을 보낼 수 있는 구조까지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사용자 행동을 기반으로 랭킹이 집계된 공고들 사이에 광고 상품을 끼워넣는 작업과 인재풀에 노출되는 이력서들을 열람 여부와 상품의 유효기간을 기준으로 마스킹 처리하는 작업이 까다로웠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를 통해 프로덕트 관점에선 완전한 채용 사이클을 구축하며 채용 플랫폼으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력서 고도화 또한 진행했는데, 내가 처음 꿈꿨던 블록(?) 이력서에 가까워졌다.
초기 아이데이션 단계에서 나는 이력서 작성 행위 자체가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하여 본인인증만 하면 모든걸 불러와서 입맛대로 조립하기만 하면 되는 이력서를 만들자고 했었다.
조금 늦었지만 한발자국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CODEF API를 통해 경력 사항과 취득 자격증 목록을 불러와서 작성할 수 있게 됐다.
이외에도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꾸준히 리팩토링을 진행해왔다.
리팩토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 자신이 성장하면서 어제 작성했던 코드가 레거시로 보이는걸 못참았던게 큰 것 같다.
가장 많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들였던 부분은 아키텍처였다.
기존엔 외부에 제공해야 하는 API도 없었고 사용하고 있는 외부 서비스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내부만을 고려하여 레이어드 아키텍처의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대학교들과의 협약을 통해 OpenAPI 형태로 API를 외부에 제공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프로덕트가 커지며 사용하는 외부 서비스들도 늘어나게 됐다.
외부와 내부는 변화의 이유와 방향 그리고 속도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속 성장 가능한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한 유연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각각의 서비스를 모듈화하여 느슨한 의존성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클린 아키텍처의 이론을 방법론적으로 잘 풀어낸 헥사고날 아키텍처를 차용했다.
또한 팀원이 있다는 것의 장점도 느낄 수 있었다.
혼자 개발하는 동안 사이드 이펙트를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테스트 케이스를 작성해두었지만 문제가 많았었다.
더미 데이터를 넣기 위해 SQL 스크립트를 사용하면서 테스트 간의 종속성이 생겼고, 하나의 API를 테스트하기 위한 여러 상황을 만드려고 코드의 중복이 많아졌다.
유일한 백엔드 팀원이었던 분이 기존의 테스트 방식을 좀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DCI 패턴을 제안해주셨다.
그동안 스스로도 불편함을 겪으면서 개선할 방법을 고민하던걸 한 방에 뻥 뚫린 느낌을 받게끔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었고, 기쁜 마음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같이 얘기하고 바로 적용했다.
이대로 회사가 로켓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프로젝트들은 성공적으로 배포가 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는데, 특히 기획과의 갈등이 심화됐다.
처음에 왔던 PM분은 내가 기획 QA를 하듯이 여러가지 케이스들을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기능명세서는 항상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였고, 개발 과정에서 몇번이고 찾아가서 질문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상상코딩’ 이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고, 마감 기한 안에 태스크를 정상적으로 끝내려면 먼저 모든 기획 의도를 파악하고 빈 부분을 매꾸는 작업을 선행해야 했다.
PM분은 퇴사하였고 새로운 PO분이 오셨는데, 같은 도메인에서의 긴 경력을 갖고 계셨고 열정이 엄청나신 분이었다.
이 분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깨닫고 팀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도적으로 팀과 프로젝트를 이끄시는 리더 성향을 가진 분이셨지만, 항상 팔로워들에게 합당한 이유를 말하고 충분히 설득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껴왔다.
그렇게 목표를 잃어갔고,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
심지어 팀원들이 기획의 부재를 오랫동안 느껴왔지만, PO분은 디자이너분들에게 Product Designer라는 R&R을 주며 기획을 위임하기까지 했다.
결국 모든건 해소되지 않았고,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리더가 됨과 동시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직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팀 개편이 이루어졌다.
PO분은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으며, 그 아래 B2C와 B2B를 대상으로 두 팀이 나눠지고 각 팀의 리드 직책이 생겼다.
의사결정 구조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는데, OKR을 통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의사결정은 팀 자체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원팀으로 아이데이션을 하고 빠르게 실험해보는 방식을 통해 내가 속한 B2C 팀은 진짜 스프린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사적 목표는 매출을 늘리는 것이었고, 우리 팀의 목표는 사용자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OKR을 위해 추적되어야 하는 지표들을 시각화하여 볼 수 있도록 대시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팀원들과 함께 사용자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하였고, 인터뷰를 통해서 회원가입의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피드백을 얻었다.
사용자 출신으로 직원이 됐었던 나는 그 사람들의 Pain Point를 똑같이 느꼈었고, 비회원 사용자들을 잡을 수 있는 지원자 통계, 자기소개서 문항 미리보기와 같은 기능들을 직접 와이어프레임까지 그려가며 기획해서 제안했다.
또한 해당 기능으로 로그인 유도를 하며, Lock-In 효과를 기대했다.
결과는 예상했던대로 성공적이었고 1~2주만에 비회원율을 30%에서 15%까지 줄일 수 있었다.
5. 준비되지 않은 퇴사
전사적으로 그동안 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유의미한 결과들 중에 특히 매출이 늘어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개발자로서 개발 업무만이 아닌 프로덕트에 대한 애정으로 업무를 해왔다.
재직기간보다 더 긴 기간동안 실제 사용자들과 오픈채팅방으로 소통해왔고,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까지하며 PMF를 찾으려 노력했다.
대학교들과 협약으로 참여했던 행사에도 방문해서 직원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졸업 선배로서 사용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을 듣고 조언해주었다.
회사가 매출을 만들지 못해서 런웨이에 압박을 받을 때도 서버 비용을 최적화해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하지만 결국 회사의 존립을 위해 나 포함 대부분의 팀원들이 권고사직되었다.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졌던 공백기
1. 자존감 추락
부랴부랴 이력서를 정리하고 보이는대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퇴사 대기 기간동안 나름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마이리얼트립, 강남언니에 서류를 합격했다.
퇴사 몇주전 팀원들과 함께 성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알고리즘 스터디 덕분에 코딩테스트까지도 잘 넘어갔다.
하지만 면접은 달랐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피드퀴즈 식으로 진행됐던 마이리얼트립 면접에서 절반 이상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한 뒤로 면접 PTSD가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군데 모두 탈락하게 됐고, 학습이 좀 더 필요하다고 느끼며 토스에서 진행하는 러너스하이 1기와 디프만 16기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모두 탈락하게 되며, 그렇게 내 자존감이 추락했다..
2. 보상 심리
퇴사 후 읽었던 책
하루도 빠짐없이 6개월간 꾸준히 한 알고리즘 챌린지
자존감이 떨어지니 보상 심리가 몰려왔다.
모아놓은 돈과 6개월동안 나오는 실업급여는 보상 심리를 더 가중화시켰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게임하는걸 좋아했기 때문에, 모든걸 끊어내고 집에만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면서 지냈다.
그럼에도 개발은 놓을 수 없었고, 알고리즘 챌린지와 독서만큼은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했다.
내 하루 루틴은 알고리즘 문제 → 독서 → 게임이 전부였고, 그렇게 3개월을 내리 놀았다.
3. 개발자를 포기할 결심으로 재도전
3개월정도 쉬다보니 다시 개발자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생겼다.
개발을 할 때가 제일 행복했기 때문에 취업을 못하더라도 개발은 하고 싶었다.
Flutter로 만든 앱 영상
그래서 이때부터 게임을 정리하고, 그 시간에 Flutter를 공부할 겸 앱을 하나 만들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개발을 해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는 만약 취업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알바를 하면서 1인 개발로 수익을 만들 생각까지 했었다.
토스페이먼츠 면접 탈락 메일
취업준비도 다시 시작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지원해본 토스페이먼츠에 서류-과제까지 합격해버린걸 계기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한달만에 grepp, 헤렌, APR, 비즈톡, 유핀테크허브 5곳에 서류 합격을 하게 됐다.
이제는 전략을 바꿔서 평상시에 기술 면접을 준비하면서 사용했던 기술들에 대한 복습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코드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Playground라는 레포지토리에 내가 해보지 않았던 시스템들을 직접 설계하고 개발해보는 케이스 스터디도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채용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늦어지는 결과 발표와 계속되는 탈락으로 실업급여가 1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왔다.
최종적으로 3개의 채용 프로세스만 남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지인추천을 통해 진행했으며, 덕분에 퇴사 이후 첫 최종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기업이어서 그런지 처우 협의가 잘 되지 않았다.
힘든 상황에서 연봉을 많이 낮추더라도 커리어를 이어가는게 나을거 같다는 생각 이면엔 그동안의 노력들이 아까워서라도 연봉을 낮출 순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남은 2군데에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생각으로 입사 취소 통보를 하게 되었다.
이미 나는 직무전환을 성공적으로 했던 경험이 있었고, 노력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걸 계속 증명해왔던 사람이었다.
이 마인드셋을 갖고 만약 탈락한다면 개발자를 관둘 결심으로 마지막 노력을 불태우며 면접에 임했다..
이직 성공, 그리고 다음 목표
에이피알 최종 합격 메일
2군데 중 한 곳은 면접 경험이 너무 좋았다.
2시간 반동안 면접관분들이랑 정말 하하호호 떠들다 나왔다.
다른 한 곳은 처음엔 떨어질거라고 생각했었다.
1시간동안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내 생각들을 잘 답변했지만, 몇몇 질문엔 후회스러운 답변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고 후자의 회사에 합격했다.
복기를 해보면 전자의 회사에선 너무 편안한 분위기였던 탓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찌됐든 면접은 회바회 사바사지만 면접 경험을 하나 더 쌓을 수 있었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갔다.
앞으로의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하며, 잘 관리해가고 싶은 마음에 나를 나타내는 사진부터 업데이트하기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력서를 정리했다.
새로이 합류하는 회사에서 더욱 많은 업적(?)을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이전 커리어에 시선을 뺏기지 않도록 내용을 정리했다.
프로필 사진을 찍은 김에 링크드인을 활성화시켰다.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각 회사의 사람들을 링크드인으로 많이 찾아보았다.
이 과정을 통해 팀의 프로젝트들과 성과, 팀의 구성원, 근속기간, 그리고 이직한 회사를 통해 성장 가능성이 있는 조직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노출되고 커뮤니티를 늘려가기 위해 링크드인을 업데이트했다.
6개월의 공백기동안 나를 돌아보고 부족함을 깊게 느꼈었다.
가장 먼저 느꼈던건 성장의 계단에서 현재 칸의 끄트머리에 멈춰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회사에 면접을 보면서 느낀 채용 시장이 3년차 개발자에게 요구하는 기술 수준은 하루 빨리 성장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심지어 사용하던 기술들도 체득이 되거나 기록이 되지 않은 것들은 다시 떠올려보려니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탐구하며 정의해가고 있던 나의 개발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내 계획은 이렇다.
입사한 후 회사의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며 새로 학습해야할 키워드를 찾아내어 학습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업무 혹은 학습한 내용을 나중에 까먹지 않기 위해 기술 일기를 작성할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퀀텀 점프를 만들기 위해선 더욱 성장 속도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멘토링이나 교육 프로그램도 찾아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을 위해 앱 출시를 목표로 앱 공부도 꾸준히 진행할 계획이다.
이 계획은 2025년 회고를 통해 얼마나 달성했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마치며
미루고 미뤄왔던 회고를 이직이라는 기쁜 소식으로 작성할 수 있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정리하며 동기부여가 됐었습니다.
SEO에 그리 잘 잡히지 않는 개인 노션 블로그지만 혹시라도 보게되는 사람이 있다면 제 글을 통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개발자가 많지 않아서 항상 개발 토크에 굶주려있는 사람이라 친하게 지내고 싶으시다면 편하게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은 2025년 회고로 돌아올 계획입니다!